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크라이페 (문단 편집) ==== [[독소전쟁]] ==== 1941년 5월, 58사단은 다시 북부집단군 18군 38군단으로 배치되어 동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와 쿠반 등지의 공격을 담당하였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초기, 크라이페가 있었던 58사단은 크라스노예 셀로라는 작은 도시를 점령하였고, [[레닌그라드]]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우리츠스크까지 진격하였다. 이 때의 공훈으로 [[철십자 훈장|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고 그 해 9월에는 대령(Orbest)으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여기서 더 진격하는 계획이 아니라 도시를 포위하고 유지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한동안 별다른 진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1941년 11월에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은 벨코프강까지 후퇴하게되는데, 이때 소련군 2충격군의 진격으로 형성된 벨코프 돌출부에 대하여 58사단이 반격을 했다. 하지만 반격 이후 크라이페가 이끄는 209연대는 다시 재반격해온 소련군에 의해서 퇴각해야만 했다. 큰 타격을 입은 209연대는 1942년 5월에 재편성되어야 했고, 크라이페 본인도 1942년부터 1943년 동안 독일로 돌아와서 교육훈련 담당 감찰직, 인사부 감찰직 등의 행정직으로 빠져있어야 했다. 크라이페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58보병사단 사단장 프리드리히 알프리히터 소장과 그 상급부대였던 38군단 군단장 지그프리트 하이네케 보병대장으로부터 "예리한 전략적 판단 및 안목, 충성심, 휘하 병력들로부터 존경받는 점" 등을 치하하며 지휘부에 사단장으로 추천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덕분에 1943년 6월에는 다시 동부전선에 79보병사단장으로 재배치되었다. 17군 예하에 있었던 76보병사단은 쿠반(Kuban)에서 활약하였으며 당시 동부전선이 슬슬 방어적 태세로에 전환했던바 많은 방어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무수한 방어전끝에 전선을 물리던 크라이페의 79보병사단은 1943년 9월에 쿠반을 포기하였고 우크라이나 전반에 주둔하였던 6군으로 재편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